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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건 9남매 막내 젖먹던 힘
 ▲ 돌을 갓 넘긴 넷째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1944년 당시 28세 꽃다운 나이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만 넷을 낳았다. 쌍꺼풀에 정갈하게 가르마를 탄 낭자머리가 이쁘기만 하다. 어떤 친구가 나에게, 자기는 자주 홈피에 글 올린다고 뽐내면서 나를 나무랬습니다. 화가 나서 앞으로 3회 연재하겠습니다. 화가 안 풀리면 이제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써서 올리겠습니다. 나를 키운 건 9남매 막내의 젖먹던 힘 [우리 엄마 이야기 1] 해가 갈수록 엄마 품이 그리워집니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유종필 기자 나는 9남매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흔에 나를 낳으셨다. 그냥 마흔이 아니고, 꼭 '막 마흔'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와서 열아홉에 첫 아들을 낳기 시작하여 막 마흔에 막내를 낳기까지, 21년 동안 아들 여섯과 딸 셋을 낳았다. 아들만 쭉 넷, 다음에 딸만 쭉 셋, 그 다음에 아들 둘을 쉬지 않고 생산해냈다. 연년생은 하나도 없고, 2년 또는 3년 터울로 임신-출산-임신-출산의 과정을 줄기차게 반복해온 것이다. 가족계획이니 산아제한이니 하는 것은 아예 용어조차 없던 시절인데다, 당시엔 흔하던 키우다 날려버린 일도 없다보니 9남매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우리 같은 농촌에서는 콩밭 매다 애를 낳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아낙네가 애 낳는 일쯤은 요즘처럼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어머니는 아홉이나 낳으면서도 시부모나 남편으로부터 별다른 대접이나 산후조리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궂은 날 삭신이라도 쑤실라치면(몸살이니 신경통이니 하는 말 대신 꼭 삭신이 쑤신다고 했다) "밤에 애기 낳고 다음 날 새벽에 시아버지 진짓상 차려서 올렸다"느니 하는 거짓말 같은, 한 맺힌 푸념이 어머니 입에서 튀어나오곤 했다. 당시 어머니 입에서 "아이고 삭신이야" 소리 한번만 나오면 그날 저녁 어김없이 비가 오곤 했다. 어머니의 몸은 어설픈 기상청 예보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일기예보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사실 내 뒤로도 어머니는 한 번 더 아기를 가졌다고 한다. 1950년대 말 농촌에도 임신중절수술이 막 유행할 즈음 나의 유일한 동생은 애석하게도 그 희생양이 되어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이전에 나의 바로 위 형, 즉 어머니로 봐선 여덟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인공유산을 최초로 시도했다고 한다. 그때는 수술이 아니라 약을 복용하는 방법이었는데, 실패했다. 어머니는 실패지만, 형의 입장에서는 뱃속 투쟁의 승리인 셈이다. 그 결과 나를 임신했을 때는 아예 유산의 시도조차 없었다고 하니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을는지. 1956년 음력 칠월 스무 이렛날 전남 함평군 해보면 해보리 발미마을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때 우리 집에는 쌀 한 댓박이 없었다고 한다. 여름의 끝자락이었던 탓이다. 그 무렵 농촌에는 보리와 밀은 풍부했지만 쌀은 구경하기 힘들었던 것이 당시 우리네 살림살이 형편이었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나는 약간 안쓰러운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온 것 같다. 9남매 막내이다 보니 친구들에 비해 어머니가 젊지 않은 점이 어린 시절 내내 가슴 한 구석의 그늘로 남아 있었다. 국민학교 때 운동회나 어머니날 어머니들이 학교에 오는 것이 싫었다. 젊은 엄마들 틈에 나이 든 우리 엄마를 보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특히 젊은 엄마들은 당시 유행하던 퍼머머리에 양장을 하고 한껏 멋을 낸 데 비해 우리 엄마는 가르마에 비녀를 꽂은 낭자머리에다 항상 한복을 입은 모습이 어린 나에게는 구식으로만 느껴져서 창피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너무도 선명하다. 어머니는 낮에는 논밭에서 개미처럼 일하고 밤이면 베틀에서 베를 짜고 물레를 돌리거나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 다림질 …. 새벽같이 밥하고 빨래하고 장보고 …. 도대체가 쉴 틈이라고는 없고 눈 붙일 틈도 없게 보였다. 더구나 어머니는 대가족의 맏며느리였다. 엄하디 엄한 시아버지, 앞 못 보는 시어머니, 무심한 남편, 아홉이나 되는 자식들. 이들은 모두 어머니의 뼈 빠지는 노동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먹고 입고 살아가는 형국이었다. 논밭 합해 30여 마지기의 적지 않은 농사를 짓다보니 일꾼들 세 끼 식사에다 두 차례 새참까지 쉬지 않고 해 나르는 일도 어머니 몫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어릴 적 누워서 주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기억이 별로 많지 않다. 언제나 나보다 늦게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셨기 때문이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은 셀 수 없이 많이 보았다. 큰방(안방을 큰방이라고 했다) 한쪽에 놓인 베틀에 앉아 온몸을 뒤틀면서 베를 짜다가 꾸벅꾸벅 조는 모습. 물레를 돌리다가 꾸벅꾸벅 조는 모습. 등잔불 아래서 바느질을 하거나 양말을 꿰매거나 이 잡다가 꾸벅꾸벅 조는 모습. 리듬에 맞춰 홍두깨질 다듬이질을 하다가도 문득 꾸벅거리는 어머니의 모습. 아궁이에 불을 때고, 까맣고 커다란 무쇠밥솥을 열고 손에 찬물을 축여가면서 밥을 푸고, 숟가락 젓가락을 짝 맞춰 밥상을 서너 개나 차리는 모습. 숯불을 활활 피워서 넙적한 다리미에 담아 옷을 다리는 모습. 콩밭을 매고 목화밭에서 목화를 따서 머리에 이고 걷는 모습. 방망이로 빨래 두들기는 모습.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낙비에 부랴부랴 빨래를 거둬들이는 모습.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5일장을 보고 지쳐서 돌아오는 모습. 이런 어머니의 모습들은 내 기억에 파노라마처럼 떠올라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콩을 삶아 메주를 빚고, 간장 된장 고추장 만드는 일은 아주 기본에 속하는 일이었다. 명절이면 수정과 식혜 약과 정과 강정 산자 깨산 등 온갖 한과를 손수 만들고, 술밥 찌고 누룩도 직접 만들어 약주를 담그는 일 등 어린 나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만능해결사 그 자체였다. 나는 9남매 막내로서 적잖은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에피소드도 꽤나 많다. 어릴 적 엄마가 젊지 않다는 점이 늘 가슴 속 그늘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이다. 특히 엄마가 앓아눕기라도 하면 내가 다 크기도 전에 돌아가시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어머니 말에 의하면 나는 아파 누워계시는 엄마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말없이 눈물만 뚝뚝 떨군 적도 있다고 한다. 국민학교 때 가장 듣기 싫었던 말 가운데 하나는 "네가 종덕씨(큰 형님) 아들이냐, 동생이냐?"하는 물음이었다. 이런 질문을 늘상 받곤 했다. 아버지와 큰 형은 17살 차이이고 형과 나는 21살 차이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기는 의문인데도 나는 그런 말에 자존심이 크게 상할 정도로 기분 나빠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나는 국민학교 4-5학년 무렵까지 잠잘 때 팔은 엄마 허리를 휘어 감고 다리도 엄마 몸에 올리는 자세를 너무나 좋아했다. 막내의 특권이라면 아마 다 클 때까지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최대 특권이었을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특권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머리카락과 관계되는 일이다. 어머니는 긴 머리에 동백기름을 발라 대나무로 만든 참빗으로 한 올 한 올 정성껏 빗어 꼬챙이로 가르마를 타고 뒷머리에 주먹만한 뭉치를 만들어서 비녀를 꽂는 낭자머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참빗이 워낙 촘촘하여 빠지는 머리카락이 날마다 적지 않았다. 둥글게 뭉쳐진 머리카락은 엿장사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물품이었다. 어머니의 머리카락은 당연히 나의 몫이었다. 별다른 군것질 거리가 없는 농촌에서 엿은 단연 인기 1호였다. 내가 지금까지 자주 치과신세를 지는 이유도 어머니의 머리카락과 바꿔먹은 엿가락 때문이지만, 그 당시는 이것이 막내로서의 대단한 독점적 특권이었다. 반면 서러운 점도 있었다. 동네 청년들로부터 "다 빨아먹고 남은 젖 나오기는 하더냐?"는 등 다분히 짖궂은 놀림을 받을 때면 서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러워할 일도 아닌데 공연히 새삼스럽게 서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분유도 우유도 없던 시절이라 틀림없이 엄마 젖을 먹고 컸을텐데, 누구나 마찬가지이듯이 엄마 젖꼭지를 물어본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9남매 막내라는 사실은 숱한 애환만큼이나 나의 정신구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흔히 '막내'하면 떠오르는 고정 이미지가 있다. 귀엽고 붙임성 있게 여겨지는 것은 긍정적 이미지이다. 어리광을 잘 부리고, 나약하고, 부모나 누나·형들에게 의존적이고, 막무가내의 고집통·심술통에다 잘 토라지고, 쉽게 포기하고, 속 좁은 것은 막내의 어두운 이미지이다. 결론적으로 막내 이미지는 나쁜 쪽이 절대 우세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막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더구나 9남매 막내라는 사실이 나의 최대치부인 양 스스로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어쩌다 알려지면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막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의식적인 노력까지 기울였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면서 그런 철없는 생각은 없어져 갔다. 요즘에는 오히려 누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저는 9남매 막내예요. 우리 어머니가 막 마흔에 저를 낳았어요"라고 무슨 큰 자랑거리라도 내놓듯이 말하면서 으쓱대기까지 한다. 어머니께서 저 세상에 가신 지도 4년이 넘었다. 해가 갈수록 엄마 품이 그리워지고 기억은 더욱 또렷해지기만 한다. 언젠가 다 늙어 쪼글쪼글해진 엄마 젖꼭지를 보면서 참 이쁘게도 생겼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또 언제부터인가 가끔씩 어린 내가 엄마 젖꼭지를 물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 둘째 아들이 제 엄마 젖꼭지를 물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우리 엄마 젖꼭지를 물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 적도 있다. 아마도 나는 시원찮게 나오는 엄마 젖꼭지에서 한 모금이라도 더 빨아 먹기 위해 온 몸의 기를 총동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 젖 먹던 힘으로 지금까지 악착같이 굴러왔고, 기를 쓰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나를 키운 것 9할은 9남매 막내 젖 먹던 힘이었다고나 할까. 유종필 기자는 <한국일보>와 <한겨레> 기자를 거쳐 MBC-TV 시사인형극 <단소리 쓴소리> 작가로 활동했다. 국민의 정부 때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K-TV 사장을 역임했고, 지난해에는 노무현 후보 공보특보를 지냈다. 지금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지역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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